서론
코로나19 펜데믹 장기화와 연일 계속되는 폭염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편협해지는 것 같다.
이럴 때면 별일 아닌 것에 과민반응을 하게 되고 마음이 편협해지면 사람의 신성에 대한 감각도 무뎌진다. 주위의 상대방은 더 이상 존엄한 존재가 아니며 화풀이의 대상이나 화를 배설하는 도구가 되고 만다. 편협한 마음은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영적 감각을 마비시킨다.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현존하지 않는 곳에서의 삶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영혼은 무기력의 늪에 빠져들게 된다.
반대로 너그러운 마음은 감수성을 풍성하게 하고 너그러운 마음은 상대방 사람의 선함과 아름다움 진실과 신성을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 나아가 간음한 여인 등과도 거리낌 없이 교제하실 수 있었던 까닭은 그분의 마음이 너그러우셨기 때문이다.
너그러운 마음은 사람들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현존인지감수성이 풍성하기에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결점의 너머에서 선한 본성과 성령하나님의 신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살다보면 큰일이 아닌 사소한 일로 마음이 편협해진 때가 왕왕 있다. 그럴 때면 신경이 예민해 지고 성령님의 현존인지감수성도 무뎌지기 시작한다. 덩달아 신성한 감각이 마비되고 사람에 대한 존중감도 삶에 대한 자족감도 약해지고 덩달아서 분노 계열의 감정들이 앞 다퉈 출몰하고 일상의 균형과 조화가 무너져서 유쾌함도 유머감각도 사라지고 일상의 천국은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이다.
본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엡 4:1-2)
부름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면서 상대방을 대해야 하는지를 잘 안내해주시는 말씀이다.
“오래 참고”라는 말이 그리스어 원문에는 “마크로티메이”(makrothymei)로 나오는데 이것은 “인내하다”라는 뜻이다. 사실 이 말은 넓고 넉넉한 성품 너그러운 마음을 의미한다. 너그러운 마음은 영성의 인간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며 하나님은 너그러운 마음에만 머무르실 수 있다.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은 언뜻 호감이 가지 않을지라도 관계를 통해 사랑을 나누고 너그러운 마음을 얻은 사람은 남들에게 무례하게 화내는 법이 없다. 너그러운 마음에는 저마다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있다. 너그러운 마음은 차분하고 너그러운 마음은 오래 참을 수 있고 너그러운 마음은 다른 사람을 신뢰하고 너그러운 마음속에서는 어떠한 무례한 요구도 찾아볼 수 없다. 너그러움은 사랑의 고유한 속성이므로 인간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복되게 만드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편협한 마음이 우리 안에서 제 목소리를 내려는 것을 끊임없이 체험한다. 편협한 사람은 주위도 편협하게 만들 뿐이고 편협한 사람은 남들에 대해 속 좁게 생각하고 남들의 옷차림이나 말투나 행동거지를 두고 자꾸만 못마땅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자신의 아버지와 또는 어머니가 얼마나 편협하고 완고했는지 토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모든 일이 정해진 원칙에 따라 진행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부모님 말에 토를 달았다가는 괘씸한 자식으로 취급되기 일쑤였고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이 다른 이웃에게는 악담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부모를 둔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부모의 편협함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정작 부모에게 물려받은 편협함을 차츰 벗어나서 마음이 너그러워질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영성의 사람이란 세월이 지날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으로 귀결 될 것이다. 너그러운 마음은 계명을 어길까봐 안달할 까닭이 없으며 너그러운 마음은 성령 충만의 기쁨 안에서 생명으로 향하는 분명한 길을 알고 있다.
결론
너그러운 마음은 영성 인간을 가늠하는 척도이며 하나님은 너그러운 마음에만 머무르실 수 있다.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입에 달고 살아도 마음이 너그럽지 않으면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것을 증거로 보여주는 것이다. 너그러운 마음속에는 저마다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있다, 저마다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란 나와 다른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말은 나와 생각이나 견해가 다른 사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참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 곧 저마다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내 맘속에 있는가? 안타깝게도 나와 다른(different) 사람들은 틀린(wrong) 사람들일 뿐이며 난폭하게라도 교정해야 하고 억지로라도 변화시켜야 우리의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던가? 편협한 마음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빗장을 지르게 한다면 너그러운 마음은 세상의 상처와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가두어 왔던 사람이라도 자신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한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너그러운 마음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바울은 또 사람을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라”고 한다. 이런 마음가짐은 너그러움에서 나온다. “사랑”이란 단어에서 사랑이 발산되는 것은 아니며 진정한 사랑은 편협이 아닌 너그러움에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지독히 편협한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더없이 너그럽고 깍듯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했다. 우리의 너그러움이 편협 되고 사나워진 세상 속에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갈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할 사명이다.
이선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