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선교시대를 대한민국이 중심이 되어서 다시 한번 열기 위해서는 조선에 와서 선교사역을 하다가 순교한 선교사들에 대한 분석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은 양화진에 주로 묻혀있다고 본다. 양화진은 한강을 중심무대로 삼은 조선왕조에서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다. 구한말 조선과 서구세력의 충돌이 주로 수상에서 이루어졌는데 양화진도 예외는 아니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응징하고자 프랑스 군함 세척이 양화진까지 침범했다가 같은 해 9월에 강화도에서 패퇴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대원군은 양이에 의해 더렵혀진 한강을 사교들의 피로 씻는다는 말로 양화진 앞 강물들을 천주교인의 피로 물들였다. 이처럼 양화진은 낯선 서구의 물결과 조선의 묵은 정신세계가 순순히 합류하지 못하고 충돌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곳이다. 현재 양화진 묘역에는 555기 이상의 묘지가 있는 데 그 가운데서 117기의 묘지는 직업인들의 묘지라고 하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으로서 외교관, 법률가, 언론인, 음악가, 기술자, 직업군인, 사회사업가 등으로 한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으며 우리나라 근대화와 안전을 위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선교사 167기의 무덤 외에도 직업인 117기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자비량 사역자로서의 저들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 가운데 미국인이 전체 직업인의 62.3%에 해당하는 73기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러시아 정교인 13기, 영국인 12기 순이다.
신호철은 이렇게 외국인 양화진 직업의 유형 가운데 언론인 선교사를 소개하고 있다; 영국인 중에는 구한말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을사보호조약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우리나라 독립운동 공훈가로 존경받는 베델,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그 부인은 순종 임금에게 영어를 가르쳐 준 졸 리가 있다. 양화진 선교사 가운데서 전문인 선교의 모형이 될 수 있는 선교사들을 직업별로 요약하고 특별히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받아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 대한 정리를 하면서 학생자원운동 소속으로 온 선교사도 있지만 그 영향을 받아서 목사 선교사로 온 자들도 있고 그 선교 파장이 상당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전문인 선교자원운동(Professional Volunteer Movement)이 자비량자원운동(Tentmaker's Volunteer Movement)을 일으킨 크리스티 윌슨 Jr.에게서 비롯되었으며 그의 아버지인 크리스티 윌슨이 학생자원운동 소속으로 중동에 선교사로 파송된 것이기 때문이다. 베델((Bethell, Ernest Thomas, 1872-1909, 언론 선교사) 그는 영국 언론인 출신자로서 일제 탄압에 대응하여 고종의 특사로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준 열사와 함께 동역하며뒤에서 활동 지원하고 일본의 압박으로 미국으로 추방당하고 병을 얻은 후, 서대문 자택으로 귀환하여 소천하였다. 일제가 그 비문을 박박 망치로 쪼아 지워버렸고 실제로 양화진에 가보니 총자국이 역력하다. 자문화우월주의(ethnocentrism)의 백인중심의 선교사 사회에서 또 그 아류인 일본의 뒤를 따라다니지 아니하고 대한 독립을 위해서 자문화관통주의(ethnobreakthroughism)를 이루기 위해서 애쓰다가 간 전문인 선지자(professional prophet)이다. 그 당시 일본은 문명국이었고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힘없는 조선의 여인을 마음대로 농락하는 것을 방임하는 사회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희생한 참 스승이었다. 그를 얼마나 미워했으면 묘비를 뭉개 버렸을까!
역사의 역습이라고 할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한반도의 정세 앞에 전문인 언론인들의 사명이 중요하다고 본다. 선교사들이 모이는 까페나 밴드 그리고 카카오톡에서도 이념을 가지고 한반도 통일을 바라는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의 그 열정으로 북한이 열리게 되면 80% 이상의 해외선교사들이 북한재개발을 위해서 국내선교사로 사역을 하게 될 것이며 동북아와 연해주에 까지 성육신적인 전문인 선교를 하게 될 것이다.
김태연교수